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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식관리자2022-01-06조회 945
노블레스 오블리주 독립운동가 이인식
李仁植, 1901-1963, 옥구
보성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3월 1일의 시위에 적극 참 여했다. 3월 5일 진행된 남대문 시위에도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한편 미국영사관과의 연락 책 임을 맡았으며, 전북 학생 대표로 활약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곧 옥구로 내려가 전답과 가옥 등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방 매하여 만주로 망명하였고 상해로 가 임시정부에 8천 원을 헌납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행 한 건국공채 8매를 받았다. 1923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금우회’를 결성하고 월보를 발간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오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6·10운동 때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정보 수집, 군자금 조달 등의 독립운동을 펼쳤 고, 이후에도 독립투사로서 상하이 임시정부 요원들과 조국 광복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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