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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itage of Korean 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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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시설

현충시설

익산시
순국열사비
관리자2021-12-31조회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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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구분

장소

순국열사비

비석

주현동 105-73필지

비 문 : 순국열사비

소재지 : 주현동 105-7번지 외 3필지

규 모 : 높이3m, 부지면적 337

건 립 : 1949. 4. 26, 익산 시민이 익산시 토지에 건립

행 사 : 3.1절 재현행사, 문용기 추모

운 영 :

주요공적

-문용기 장로는 1878년 익산시 오산면 관음부락에서 태어났다.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그는 24세 때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한 후 전남 목포와 함경도 갑산 등지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쳤다.

-326일 이래로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어, 일본 보병중대가 이리에 주둔하여 전주·군산·익산방면의 통행자를 일일이 검색하고 있어서 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박도현·장경춘 등 기독교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이리 장날인 44일에 다시 거사하기로 사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장날 정오경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이중에는 서울에 유학하던 중 귀향한 중동학교 학생 김종현·김철환· 이시웅·박영문 등도 합세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점차 군중들이 늘어나 1천여명이 되고, 그 기세도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다시 일본의 보병부대까지 출동하여 제지하려 했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여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군중이 이에 대항하며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그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왼팔마저 베어 버리고 그는 두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41세에 순국하였다.
-이 거사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의 거룩한 독립운동정신은 45일 이후 각지에서 전개된 횃불 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비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

-문용기 열사의 출신지인 익산군 오산면 소재지에는 순국열사기념비, 익산역 광장에는 삼일운동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상 훈 :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묘 역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권삼득로 285 전북특별자치도보훈회관 (금암동 664-55)
TEL : 063)224-1395 / FAX : 063)224-8745 / E-mail : jbkb8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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