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구분 | 장소 |
이병기선생 생가 | 생가 | 여산면 원수리 573 진사마을 |
❍소재지 : 여산면 원수리 573(가람1길 64-8)
❍규 모 : 초가 3채, 건축면적 45㎡, 부지 1,080㎡
❍건 립 : 이원배 소유 토지
❍전 시 :
❍행 사 : 시조문학제, 9. 20
❍운 영 : 익산시장
❍주요공적
-익산 사람으로 1927년 2월 권덕규·최현배·정열모·신명균 등과 같이 "한글사"를 조직하고 월간 잡지 "한글"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연구회가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이 되어 사전편찬의 일을 추진하였다.
-192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민족(국민)문학의 부흥을 주장하고, 고유한 민족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의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어연구회의〈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사의 지원으로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 확대 개편)의 전국 순회 조선어강습회에 강사로 참가하여 1천 6백명의 지도층 청년들에게 한글 강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에는 민족문화와 국사·국어국문 등 국학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 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어학회가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상 훈 :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묘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