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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itage of Korean 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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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시설

현충시설

무주군
의병대장 문태서 순국비
관리자2021-12-31조회 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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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구분

장소

의병대장 문태서 순국비

비석

설천면 삼공리 879-4

비 문 : 의병대장문공태서순국비

소재지 : 설천면 삼공리

규 모 : 탑높이 3.2m, 기단 0.5m, 부지 936

건 립 : 무주군 토지에 건립

행 사 :

운 영 : 설천면장, 063-324-7004

주요공적

-경남 安義 출신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 면암 최익현을 예방하고,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하였다. 무주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19069월 중순 장수 양악에서 박춘실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 30여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1월에 부남면 고창곡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40여명을 사살, 총기 50여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8년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28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 등을 불질렀다.

-19091월 지례군 대덕산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경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190958일에는 남원군 문성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청산·옥천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30일에 경부선 이원역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190912월에 무주를 중심으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1910년 대군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8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 조기래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2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상 훈 :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묘 역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권삼득로 285 전북특별자치도보훈회관 (금암동 664-55)
TEL : 063)224-1395 / FAX : 063)224-8745 / E-mail : jbkb8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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