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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itage of Korean 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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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시설

현충시설

김제시
의사 해학 이기선생 생가
관리자2021-12-31조회 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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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구분

장소

의사 해학 이기선생 생가

생가

성덕면 대석리 340-1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40-1

규 모 : 정면 4, 측면 2

건 립 : 이정환 토지

행 사 :

운 영 : 고성이씨 화수회장, 010-8642-7111

주요공적

-김제 출신으로 한학을 수학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그는 實事求是經世致用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實學을 연구하였다.

-특히 磻溪 柳馨遠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기울여 田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정세는 국내적으로 閔氏族閥政治,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러시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운을 보존치 못할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를 개혁하여서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민생의 도탄을 외면하는 閔氏政權을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東學農民革命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全琫準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드에서 講和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나인영·오기호 등의 동지와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공사 임권조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일왕과 이등박문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1906년에 장지연·박은식 등과 함께 애국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2월 나인영·오기호 등과 함께 을사오적신을 처단하기 위해서 폭발장치를 한 선물상자로 위장하여 박제순과 이지용에게 우송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오적신 모두를 한꺼번에 처단하기로 하고 나인영·오기호 등과 자신회를 조직하였다. 이 자신회는 김동필· 박대하·이홍래 등 40여명의 청년들이 가입하였고 많은 애국지사들의 협조가 있었다.

-1907325일 아침, 그는 동지들과 각기 지정한 장소에서 박제순·권중현 등을 처단하기 위해 대기하였으나 상호 연락미비와 계획차질로 단지 권중현에게만 가벼운 총상을 입혔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와 동지들은 재차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일부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고 말았다.

-1907년 평리원의 판결에서 7년 유배형에 처해졌던 그는 전라도 진도에 귀양갔다가 얼마후 풀려났다.

-그후 서울에서 호남학회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상 훈 :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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