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구분 | 장소 |
덕산사 | 사당 | 성내면 덕산리 산20-1 |
❍소재지 : 성내면 덕산리 산20-1
❍규 모 : 정면3칸, 부지330㎡
❍건 립 : 1947, 재건 1995, 백훈소유 토지에 건립
❍행 사 : 白貞基, 白麟洙, 白寬洙 추모
❍운 영 : 남대복, 063-562-3218
❍주요공적
-백정기는 1896년 전북 부안군 동진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같은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물을 파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자 만주로 피신하였다.
∙28세 1923년에 일왕을 암살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관동조선인 대학살사건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조직적인 아나키스트 활동을 펼쳤다.
∙1930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했으나 만주사변이 발발하여 동지들과 상하이에서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1931년 11월 한국․중국․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적의 국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파괴․요인 사살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흑색공포단을 조직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가 상하이 홍커우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에서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이강훈․원심창과 함께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순국하였다.
∙상훈 :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백인수는 1856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당시 의관벼슬에 있었는데 을사보호조약을 결사반대하며 백정기와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이제 우리 민족에게는 죽음만의 항쟁이 있을 뿐이다. 나라가 없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이냐?”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상 훈 : 1977년 건국포장 애국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백관수는 문경공파조 백인걸 8대손으로 성내면 生芹里에서 태어났다.
∙김성수와 같이 수학하고, 신문학에 뜻을 두고 동경유학을 떠났다.
∙송진우․김병로 등과 친분을 두터이 하면서 항일운동을 모의하고 상해임시정부의 金九․金奎植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기미년에 일본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에 추대되어 김도연․나용균․이광수․장덕수 등과 긴밀한 연락 끝에 3.1운동의 도화선인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였고 드디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 뒤에 항일문화활동을 위해서 조선사정연구회와 홍문사를 만들어 월간동방평론을 발간하고 태평양회의민족대표로 참가했다.
∙중앙고보에서 육영에도 힘썼고,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그 재임중에 강제발간시키려는 총독부와 맞서서 옥중에서도 끝끝내 굴할줄 모른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인촌과 함께 한민당 창당 산파역을 하고 입법의원법사위원장 제헌국회 법사위원장 등을 역임한 정계의 거물이였으나 6․25당시 강제 납북되였다.
-백관수는 교육자․언론인․독립운동가․정치인이다.
∙일본 유학 중 1919년 신익희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귀국 후 중앙학교에서 잠시 교육활동을 하다가 동아일보에 투신, 언론계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으로서 헌법기초를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