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구분 | 장소 |
도동사 | 사당 | 신림면 가평리 168-3 |
❍소재지 : 신림면 가평리 168-3
❍규 모 : 건축면적 50㎡, 부지면적 334㎡
❍행 사 : 최익현, 고용진, 고석진, 고예진 추모
❍운 영 : 고수원, 063-562-4581
❍주요공적
-일제 강점기 사당으로 원래 고석진이 후학을 가르치던 방호정사가 있던 곳인데, 1928년 6월에 후학들이 방호정사의 안쪽에 사우를 지어 최익현과 독립의군부 참모장을 지낸 고석진, 의병장 고예진․고용진 등 4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하고 있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14세 때에 이항로의 문인이 되어, 위정척사 사상을 이어받아 존왕양이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 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 갑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 척결과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반대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통상 확대와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임락 등과 함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단식을 하는 등 끝까지 저항하다가 4개월 만에 사망했다.
∙상 훈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묘 역 :
-고석진은 을사조약이 성립되자 스승인 최익현의 단식결사 소식을 듣고, 장귀동에 달려가 지사를 규합하여 창의 토적할 것을 모의하다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고종의 밀칙을 받아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참모총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하여 제2인으로 서명하였다.
∙상 훈 :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고예진은 최익현의 문인으로 1906년에 최익현이 창의할 때 종형인 고석진과 함께 의거에 참여해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고, 많은 무기와 군량을 모아서 옥천으로 운송하였다.
∙1914년 독립의군부 서기관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항일운동에 진력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 훈 :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고용진은 형 고석진과 아우 고예진과 함께 최익현 의진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1913년 9월 독립의군부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1919년 4월에는 파리장서운동에도 참여하여 호남지방 유림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상 훈 :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