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구분 | 장소 |
나용균 생가 | 생가 | 영원면 운학리 164-1 |
❍소재지 : 생가 영원면 운학2길 14-6(운학리 164-1), 사당 166-1
❍규 모 : 생가(사랑 72.8㎡, 문간 62.6㎡, 고방 39.5㎡, 부지면적 1,687㎡), 사당(부지면적 1081㎡)
❍건 립 : 1890년경, 나영호외 2인 소유 토지
❍운 영 : 정읍시장
❍주요공적
-정읍 출신으로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종로에 정착하였다.
-1918년경 일본 동경에 유학 중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발표와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약소국의 독립분위기에 따라 동지 백관수․김도연 등 7명과 같이 적지에서라도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자는 비밀회합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동경 한국인 유학생․청년 등을 규합하고 독립선언문 낭독,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운동 전개 계획을 세웠다.
-1919년 2월 8일 적지에서 2․8독립선언을 실현케 하였다. 즉 그는 2 8독립선언을 위한 재정책임을 맡아 귀국 송진우․김성수․최 린 등 독립지사를 방문 협조를 당부하였다. 이 같은 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에 자극되어 이들도 3․1운동을 중앙중학교 중심으로 계획하였다.
-그는 2․8독립선언이 있은 뒤 주모자가 체포되고 연루자도 미행 당하는 등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그해 4월경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법제위원과 정부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이동휘․여운형․ 김규식 등과 한국대표로 참석 독립을 호소하였다.
-동년 5월 10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에 선임되어 국민의 대결속과 독립운동을 위한 대동단결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 보사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상 훈 :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