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구분 | 장소 |
운련전적의혼 추모비 | 비석 | 성수면 태평리 146, 추모비 공원 내 |
❍비 문 : 운현전적 의혼추모비
❍소재지 : 성수면 태평리 146 일대, 추모비공원내
❍규 모 : 높이 3m 건평 4㎡, 부지 2237㎡
❍건 립 : 2005. 10. 19, 임실군유지에 건립
❍행 사 : 이석용 의병장과 휘하의 28의사 추모
❍운 영 : 성수면장, 063-640-9003
❍주요공적
-이석용은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1897년 8월 그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으로 이거한 후 경향각지를 순회하며 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과 시세를 논하였다. 특히, 면암과 연재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제가 한일합병 후 통감부를 설치하자 전라도에서는 1906년 봄부터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는데,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12의사가 체포된 이후에는 그는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7년 8월 하순 그는 왜적의 침탈을 막기 위해 의병에 나설 것임을 부모에 알리고서 죽음을 각오하고 의병의 길로 나섰다.
-의병부대는 창의동맹단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당시 마이산 용암에는 1천여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진안읍 공격하여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점령하여 파괴하였으며, 일본어 통역의 집에 있는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통신망을 사용할 수 없도록 전선을 끊었다. 아울러 일진회원 스스로 사무소의 깃발을 내리게 했으며, 군율을 엄히하여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한 후 1907년 음력 11월 중순 그는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의진을 재정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북특별자치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부터 의령단 설치운동을 통해 점차 무력감에서 벗어난 그는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1912년 겨울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임자밀맹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그는 한인 순사에 의해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사형이 언도되자 그는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1914년 4월 3일 그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08년 3월 22일 최대의 격전지인 임실운현전투에서 17명의 의병들이 순국하였고 그들을 기려 그 장소에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