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Heritage of Korean Independence

광복회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국민화합을 선도합니다.

현충시설

현충시설

고창군
한말의사 박도경 추모비
관리자2021-12-30조회 702


image


image

명칭

구분

장소

한말의사 박도경 추모비

비석

고창읍 교촌리 222-5

비 문 : 한말의사밀양박도경추모비

소재지 : 고창읍 모양성로 88

규 모 : 높이 1.5m, 부지면적 12

건 립 : 1963, 이전 2011. 6, 고창군수

운 영 : 고창읍장

주요공적

-1874년 고수면 은사리에서 본관이 밀양인 박준식의 아들로 한미한 가정 출생으로 대대로 모양(지금의 고창)에서 살았다.

-언변과 기개가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늘 "장부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방안에서 죽는다면 그 위인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성재 기삼연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하고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였다.

-모양현의 무기고에는 좋은 가 많이 저장되어 있다는 정보를 성재에게 알리니 문수사에 주둔하고 있던 의진이 모양현을 내습하였다. 이때 박도경은 현내의 동지들과 내응하여 창고의 무기를 모두 꺼냈다. 또 적과의 접전에서 왜적 수명을 살상하였으나 의진의 희생은 34명이나 되었다. 훈련되지 않은 의진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박도경은 무기를 거두어 감추었다가 군사가 모이는 날에 비밀히 기별하여 운반해 가게 하였다. 당시 박도경은 성재 의진에서 김익중서석구전수용김치곤박영건정원숙성철수 등과 더불어 종사로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통령에 김용구, 참모에 김엽중김수봉이 임명되었다. 박도경은 이들과 함께 전남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성재 의진은 무장법성포고창장성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

-19079월 영광에서는 포사대장으로 천자포를 휴대하고 대원들을 지휘하여 광주담양순창 등지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19081월 의병장 기삼연이 광주에서 순국한 뒤, 박도경은 격문을 돌리고 김공삼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규합하여 본진을 세우고 스스로는 포사장이 되고, 김공삼은 선봉, 김일문을 포장으로 임명하고 의진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성재의 의진은 주요 의장들에 의하여 나뉘어 지휘되었기 때문에 의진의 의기가 다소 감소되는 듯하였다. 이에 김공삼과 의논하여 여러 진을 합하여 강대한 세력을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제일 먼저 김영엽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합진하기를 청하였다. 이들은 광주를 습격하여 성재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에 김영엽이 유종여 등에게 피살되었다. 박도경은 군사를 거느리고 손룡산으로 들어가 하수인 2인을 잡아서 죽일 수 있었으나 유종여는 놓쳐 버렸다. 군사를 이끌고 다시 장성으로 돌아와 군사를 교련하면서 그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동안 성재 의진에서 활약하던 金準 등이 광주 어등산에서 순국하는 등 점차 형세가 어려워져 갔다.

-1909년에 그의 의진의 규모는 다소 확대된 듯하다. 19092월에 부하 박이일이 체포된 후 공술한 바에 의하면 "부하는 110명이고, 선봉장 이도운, 중군장 손도연, 도십장 구연역과 좌우익장 및 참모를 거느렸다." 고 한다. 무기는 총 139, 24본 등으로 의진 중에서 비교적 무력이 강력한 편에 속하였다.

-1909년에 상당수의 의진이 해체되어 형세가 외로와 졌기 때문에 전해산의진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체로 남포부안 등 해안가에 의지하여 활약하였다. 420일에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부안 상서면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였다. 점차 적의 포위망이 좁혀져 의병활동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의진을 해산하고 가협 산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의 은신처마저 적에게 노출되자 "내가 여기에 있으니 마음대로 잡아가라" 하였다. 체포되어 구금된 중에도 적을 꾸짖는 말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옥중에서 수많은 고초를 받았으나 그는 끝내 의연하여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송 받았다.

-190912월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왜놈의 손에 죽는 것보다 자결하는 것이 옳다고 결심하고 191028일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대구의 아전들이 돈을 추렴하여 초상을 치렀다. 마침 약령시가 열렸으므로 많은 북도의 상인들이 모였는데 이들이 수백 냥을 모아 고향으로 반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영남의 선비들이 제전을 올렸다. 그의 어머니는 미천한 신분으로 사대부의 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여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상훈 :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묘역 : 대전국립현충원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권삼득로 285 전북특별자치도보훈회관 (금암동 664-55)
TEL : 063)224-1395 / FAX : 063)224-8745 / E-mail : jbkb815@hanmail.net

Copyright 2021. 광복회 전북특별자치도지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