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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이란? (殉國先烈)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한 분으로서 그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이나 건국포 장, 대통령 표창을 받은 선열을 일컫는다. 국민의례에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는 이 유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영령을 애도함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한 순국선열의 숭고한 독립정신,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맞서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 한 독립운동 유공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 기념일이다. 현재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 참여자 300만 명 중 15만 명을 순국선열로 추산하고 있다.殉國先烈
2022.01.06
자정순국의 의의 (自靖殉國)
‘자정순국’은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투쟁을 의미한다. 일제의 침략과 한국 병 탄이 부당하고 결코 거기에 고개 숙이고 살 수 없다는 선택으로, 즉 그 어떤 저항보다도 강한 성격의 투쟁이다. 을사늑약 체결,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를 전후하여 많은 애국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일제 의 부당함을 증명했다. 이들의 순국에는 ‘나라와 의리 지키기’라는 뜻이 담겨 있다. 황제 와 나라, 겨레에 대한 인식 자체가 거의 종교와 마찬가지이므로 이들의 선택은 단순한 자 살이 아니라, 순교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전국에서 목숨을 끊은 순절자는 90명 내외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이름과 출신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인물은 대개 70명 정도이며 행적이 밝혀져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은 61명이다. 우리 고장 전라북 도에서 자정순국한 선열은 17명이다.自靖殉國
2022.01.06
전북특별자치도의 항일의병
의병의 시작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1895년의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 등에 항거하여 봉기하기 시작한 의병은 특히 을사늑약 체결 직후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확 대되었다. 1907년 하반기부터 1909년까지 가장 활발했던 의병들의 항쟁으로 을사늑약 이후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시도를 여러 해 동안 막아 낼 수 있었다. 초기 의병 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으나, 점차 농민·포수·보부 상·해산 군인·동학교도 등이 참여하는 항일 전쟁으로 발전했다. 특히 호남 지방에서 의병 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전북특별자치도가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가장 심한 지역이 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전북특별자치도를 식량과 원료 공급 기지로 이용함과 동시에 일본 의 공산품 판매 시장으로 만들었다. 최익현의 태인 의병초기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여파로 의병 운동이 적었으나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퇴위를 시작으로 한일신협약, 군대 해산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면 서 호남은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호남 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을사늑약 체결 후 최익현을 중심으로 일어난 태인 의병이었다. 최익현은 1907년 6월 태 인 무성서원에서 기우만 등과 함께 격문을 발송하고 110명이 서명한 동맹록을 작성해 거병을 호소하였고, 이에 80여 명의 유생이 동참하면서 태인 의병이 시작되었다. 태인 의병은 전북특별자치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항일의병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며 전국 의병운동에 도 영향을 끼쳤고, 의병운동이 상소 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에서는 수많은 의병이 무력 투쟁을 전개했다. 호남 의병의 축소호남의 의병은 대개 유생들이 지도부를 이루었으나 참여자 대부분은 농민으로 구성되었 다. 이전 동학농민혁명이 반봉건적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의병운동은 일제에 저항하는 반 침략 항쟁의 성격이 더 강했다. 그러나 1909년 호남 지방과 그 주변 지역의 항일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대대적인 일제의 군사작전인 ‘남한 대토벌 작전(호남 의병 대학살 사건)’ 이 전개되면서 전북특별자치도 의병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기록된 전북의 의병 수와 교전 횟수는 1908년 219회 교전, 의병 수 9,960명, 1909년 273회 교전, 의병 수 5,576명으로 1908년에는 전국의 1/4, 1909년에는 전국의 절반을 차지한 것으로 나 타난다.
2022.01.06
전북특별자치도의 3·1운동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 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 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전북특별자치도의 3·1운동은 3월 3일 천도교와 개신교 조직망을 통해 전주, 군산, 이리 곳곳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독립선언문이 배부되면서 시작되어 약 한 달 반 동안 지속되었다. 3월 4일 군산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일제는 물러가라, 조선은 독립했다”는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들고 거리 시위를 전개했고, 그 뒤를 이어 전북특별자치도 14개 전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0일에 오수보통학교, 3월 15일에 고창보통학교, 4월 4일에 김제보통학교, 4월 18일에 줄포 보통학교 어린이들이 시위에 참 여했다. 특히 김제 만경에서 벌 어진 보통학교 학생 시위는 해 당 학교 교사가 앞장서서 시위 를 주도한 보기 드문 사건이었 다.군산에서 출발한 3·1운동군산 지역이 전북특별자치도 지역 중에서 만세 시위가 제일 먼저 계획되고 실제로 벌어짐으로 써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때의 운동 경험은 이후 군산 지역에서 벌어졌던 지역 사회운동의 인적·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일제의 문화 정치 공간에서 청년운동, 농민운동 등 다양한 대중운동이 전개됐다. 군산은 조선 말 동학농민운동 진원지라 할 고부·고창에 근접한 지역으로서, 일제강점기 에도 일본인 대지주의 수탈이 심했기 때문에 시위가 매우 격렬했던 곳이다. 많은 사상자 가 발생한 군산 지역의 3·1운동은 일제의 헌병, 경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됐다. 3·1운동 당시 군산 지역에서만 7건의 만세 시위 사건이 발생했는데, 영명학교 학생들의 교사 석 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이어서 시내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 운동이 발생했다. 1919년 3월 4일부터 3월 12일까지 군산 지역에서 9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중 청소년 10여 명은 풀려나고, 나머지는 검사국 및 군산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이후 군산 지 역에서 만세 시위의 규모가 가장 컸던 시위는 1919년 3월 30일 만세 시위였다. 여기서 한국인 청년 21명이 피살되고 37명이 부상당했다. 시위와 방화로 징역 6개월 이상을 선 고받은 자는 40여 명이었다. 3·1운동에 뛰어든 전북의 사람들많은 전북특별자치도 출신 인물이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각 교단에서 추천받아 구성된 민족 대표 33인은 3월 1일에 낭독할 독립선언문과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 통고서 등을 만들어 서명했는데, 전북 출신의 박준승, 백용성, 임규, 정 노식 등이 여기에 가담했다. 임실의 박준승은 손병희로부터 3·1운동에 참여하라는 권유 를 받고 전라도 지방 천도교 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고, 장수의 백용성은 한용운 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참여했다. 임규는 독립선언문 문구 수정에 참여했고, 독립운동 자 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했으며, 주시경의 우리말 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 정 노식은 민족 대표 4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울에서 3·1운동과 청년회 조직 활동에 관 여하다가 일제에 잡혀 투옥되었다. 3·1운동이 미친 영향이처럼 3·1운동의 중심 세력은 주로 기독교·천도교·불교 등의 종교계와 학생·농민들이었 다. 동학농민혁명과 의병활동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이 극심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121회에 걸쳐 175,000여 명이 참여했다는 데에 의미가 크다. 이 과정에서 인명 피해는 사망 108명, 실종 417명, 부상 890명 등이 발생했다. 전북특별자치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일제의 통치 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 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일본 경찰이 독립만세를 외친 조선인 여성을 감옥으로 끌고 가는 모습
2022.01.06
전북특별자치도의 학생운동
군산 영명학교1919년 3월 5일에 있었던 옥구군 구암리의 독립만세 시위는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전개됐다. 2월 26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영명학교 출신 김병수가 독립선언서를 반입하여 구암교회 박연세(영명학교 교사) 장로에게 전달했고, 이후 박연 세와 이두열 등의 지도로 영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6일 장날에 시위를 벌이기 로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3월 5일 새벽 박연세·이두열 등이 잡혀갔다. 하지만 학생들은 같은 날 오전 8시경부터 미리 준비해 둔 3,500장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꺼내 들고 시위에 들어갔다. 당시 구암예 수병원 직원들도 시위에 합세하였고 군산경찰서로 행진할 때는 군산교회 교인들과 군산 공립보통학교 학생, 시민들까지 만세 시위를 벌였다.오수공립보통학교1919년 3월 10일 임실군 오수리에 위치한 오수공립보통학교에서 임실군 최초로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오수공립보통학교 교사이던 이광수는 고종의 인산 소식이 알려지자 서울로 가서 오세창 등과 만나 만세운동 진행에 관한 지시를 받아 내려왔다. 3 월 10일 10시경 첫 시간 수업이 끝난 뒤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은 이광수의 지도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놀란 일본인 교장이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학생과 학부 형에게 시위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여 학생들에 의한 만세 시위는 금세 잠잠해지고 말았 다. 비록 어린 학생들에 의한 소규모 만세운동이었지만, 오수공립보통학교 만세 사건은 임실 지역에서 더욱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연달아 발생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후 3월 12일에는 임실장터, 23일에는 오수장터에서 수많은 군 중들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전주 신흥학교1919년 3월 13일 신흥학교 학생 및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천주교 건너편에서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배부하고, 12시 20분경 남문 밖 시장 부근으로부터 제2보통학교(현 완산학교) 교정 부근까지 만세 시위를 했다. 이를 주도한 신흥학교 학생들은 고형진·남궁현·김병학·김점쇠·이기곤·김경신 등으로 모두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신흥학교 학생들은 기숙 사 안에서 태극기와 전단 등을 직접 작성하여 1월 25일 아침에 학생 70여 명과 함께 태 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때 학생 36명이 검거되어 15~29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7년 10월 5일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고 폐 교령이 내려지기 전에 자진 폐교하였다.기전여학교기전여학교는 신흥학교와 함께 전주 지역 3·1운동을 주도하고,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시위를 전개하는 등 활발히 항일운동을 펼쳤던 학교다.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에 임영신·최경애·최금수·함연춘·정복수·송순이·김신희·최요한나·강정순· 김순실·김나현·김공순 등의 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구속·기속되었다. 1930년 1 월 24일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기전여학교 학생들도 이에 호응하여 격 문을 뿌리고 깃발을 꽂으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 39명이 구속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9일에는 기숙사 학생 76명이 단식투쟁에 돌입하였다. 1937년 10월 5일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하였다.전주고등보통학교전주고등보통학교는 광복이 될 때까지 반전운동과 항일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했다. 1924년 4월 학생들은 일관성 없는 학제와 불평등한 반 편성에 항의하여 동맹 휴학을 단 행했다. 전교생이 참여한 맹휴에서 백상용을 비롯한 5명의 학생이 자퇴했다. 1926년에 는 교장 오사다의 민족 차별과 망언에 분개한 학생들이 퇴학당한 이종기·이용기 등의 민 족정신에 고취되어 맹휴를 단행했다. 당시 50여 명의 동의를 얻어 5개 조건을 학교 당국 에 요구했고, 이에 학교 당국이 학생들에게 탄압을 가하자 학생들은 오사다 교장을 학교 밖으로 추방했다. 교장 추방 사건으로 경찰관들이 주동자들을 연행하자 학생들은 전주경 찰서로 몰려가 ‘학원 문제에 대한 경찰의 간섭’, ‘구속 학생에 대한 혹독한 심문’ 등에 대해 집단 항의했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 장태성을 비롯한 10여 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학 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929년 5월 22일에는 권용훈·김규선 등 10여 명이 친일 학생을 구타하고 일인교사 축출을 요구하며 총궐기했다. 이때 일경에 의해 140여 명이 검거됐 다. 당시 정해철·최재선 등 14명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일부는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40년 이후 북중학교로 편제됐다.6·10만세운동6·10만세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이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는데 시위를 주도 한 이동환은 정읍 출신이었다. 이날 인쇄된 격문에는 “2천만 동포여, 원수를 몰아내자. 피 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내용이 실렸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산·순창에서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창은 고창고등보통학교 2학년 강석영이 주도해 조직적으로 이뤄졌고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동조 시위는 전주14에서 시작됐다. 1930년 1월 20일 오전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전주공업보통학교·신흥학 교 등에서 시위하려다 실패했고, 그 후 전주·익산·고창 등지에서 학생들이 끊임없이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월 22일에는 고창고등보통학교가 고창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했으나 실패했고, 신흥학교 학생들은 1월 25일 시내에 항일 격문을 뿌리며 깃발을 들고 만세 시위를 했다. 같은 날 기전여학교 학생들도 학교 뒷산에서 격문을 살포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밖에 정읍농업학교, 삼례영신학교, 삼례보통학교, 이리농 림학교, 정읍보통학교 등에서도 시위를 전개했다.6·10만세운동. 일본 경찰이 만세 시위 군중을 진압하고 있는 모습
2022.01.06
전북특별자치도 독립운동가들의 국외 활동
2·8 독립 선언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 학생들이 모여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 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사건, 이른바 ‘2·8 독립 선언’이 있었다. 2·8 독립 선언은 전 라북도 출신 유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날 행사에서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 고, 조선 청년 독립단장인 백관수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배후에서 거사 자금을 조달 한 나용균, 정노식 등도 모두 전북인이었다. 그들이 작성한 2·8 독립선언문은 시민 혁명 적 민주주의를 주창한 구체적이고 투쟁적인 선언문이었다. 일제는 근대 학생운동을 촉발 한 2·8 독립 선언의 위상을 은폐·축소하려고 이 운동이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추동된 타 율적인 운동’이라고 규정했으나, 2·8 독립 선언의 본질은 당시 국내·외 상황을 능동적으 로 해석하고 일제 식민 지배에 스스로 대응하려는 주체적 민족 독립운동이었다. 이 계획 은 일제 경찰의 강제 해산과 유학생 대표들의 검거로 인해 실패에 그쳤지만,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우리 민족의 의사를 대내·외에 알리고 곧장 국내의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결 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임시정부의 수립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에 따라 각 지역에 존재한 망명 정부의 통합을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한 반도의 한성 정부, 상해의 상하이 정부 등이 한민족의 광복 의지를 담아 1919년 4월 11 일 중국의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임시정부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 을 전개한 전북의 인물로는, 나용균, 이종희, 김일두 등이 있다. 정읍 출신의 나용균은 임 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법제위원과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했다. 김제의 이종희는 1942 년 10월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전라도 의원선거회장으로 임명되어 임시의정원 의 의원을 역임했으며 광복시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광복군 고급 참모로서 항일투 쟁을 계속했다. 또한 순창의 김일두는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일어난 학생운동 주역들의 모습(출처: 나무위키)국외 독립운동가 백정기와 정현섭우리 고장 출신인 백정기는 국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3·1운동 당시 고향에서 일본 군사 시설 파괴를 공작하다 체포되었지만 본적지와 행적을 속이고 빠져나오게 됐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 윤봉길 의거 당일 그도 같은 의 거를 준비했으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1933년 3월 17 일 중국 상하이 고급 요정 육삼정에서 일본 정계와 군사계의 거물들과 중국 국민당 고관 들이 화합을 갖는다는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고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밀정의 신고로 거 사 직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육삼정 의거는 의열단의 황푸탄 의거 (1923), 윤봉길 의사의 의거(1932)와 더불어 중국 상하이에서 벌어진 ‘3대 의거’로 꼽히 고 있다.상하이에서 백정기와 함께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정현섭은 김제 출신으로 이회영·신채호 등과 함께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설립에 관여하였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자 한·중대연합 항일 구국 연맹을 결성하고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또 대일 항전 기간 동안 유격대를 조직해 유격전을 전개했고, 일본군에 편입되어 있는 ‘한인학도병’ 유출 공작 과 구미인 구출 공작을 지휘했다. 당시 한국 청년 귀순 공작을 전개한 결과 그 수가 천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지하신문이었던 『자유연합신문』에 나온 백정기 의사에 대한 기사(1934년 2월)
202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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