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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의 항일의병
관리자2022-01-06조회 364

의병의 시작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1895년의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 등에 항거하여 봉기하기 시작한 의병은 특히 을사늑약 체결 직후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확 대되었다. 1907년 하반기부터 1909년까지 가장 활발했던 의병들의 항쟁으로 을사늑약 이후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시도를 여러 해 동안 막아 낼 수 있었다. 초기 의병 운동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으나, 점차 농민·포수·보부 상·해산 군인·동학교도 등이 참여하는 항일 전쟁으로 발전했다. 특히 호남 지방에서 의병 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전북특별자치도가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가장 심한 지역이 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전북특별자치도를 식량과 원료 공급 기지로 이용함과 동시에 일본 의 공산품 판매 시장으로 만들었다. 


최익현의 태인 의병

초기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여파로 의병 운동이 적었으나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퇴위를 시작으로 한일신협약, 군대 해산으로 이어지는 혼란한 상황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면 서 호남은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호남 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을사늑약 체결 후 최익현을 중심으로 일어난 태인 의병이었다. 최익현은 1907년 6월 태 인 무성서원에서 기우만 등과 함께 격문을 발송하고 110명이 서명한 동맹록을 작성해 거병을 호소하였고, 이에 80여 명의 유생이 동참하면서 태인 의병이 시작되었다. 태인 의병은 전북특별자치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항일의병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며 전국 의병운동에 도 영향을 끼쳤고, 의병운동이 상소 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에서는 수많은 의병이 무력 투쟁을 전개했다. 


호남 의병의 축소

호남의 의병은 대개 유생들이 지도부를 이루었으나 참여자 대부분은 농민으로 구성되었 다. 이전 동학농민혁명이 반봉건적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의병운동은 일제에 저항하는 반 침략 항쟁의 성격이 더 강했다. 그러나 1909년 호남 지방과 그 주변 지역의 항일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대대적인 일제의 군사작전인 ‘남한 대토벌 작전(호남 의병 대학살 사건)’ 이 전개되면서 전북특별자치도 의병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기록된 전북의 

의병 수와 교전 횟수는 1908년 219회 교전, 의병 수 9,960명, 1909년 273회 교전, 의병 수 5,576명으로 1908년에는 전국의 1/4, 1909년에는 전국의 절반을 차지한 것으로 나 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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