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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itage of Korean 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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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순국선열
전북특별자치도의 학생운동
관리자2022-01-06조회 323

군산 영명학교

1919년 3월 5일에 있었던 옥구군 구암리의 독립만세 시위는 군산 영명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전개됐다. 2월 26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영명학교 출신 김병수가 독립선언서를 반입하여 구암교회 박연세(영명학교 교사) 장로에게 전달했고, 이후 박연 세와 이두열 등의 지도로 영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6일 장날에 시위를 벌이기 로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3월 5일 새벽 박연세·이두열 등이 잡혀갔다. 하지만 학생들은 같은 날 오전 8시경부터 미리 준비해 둔 3,500장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꺼내 들고 시위에 들어갔다. 당시 구암예 수병원 직원들도 시위에 합세하였고 군산경찰서로 행진할 때는 군산교회 교인들과 군산 공립보통학교 학생, 시민들까지 만세 시위를 벌였다.


오수공립보통학교

1919년 3월 10일 임실군 오수리에 위치한 오수공립보통학교에서 임실군 최초로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오수공립보통학교 교사이던 이광수는 고종의 인산 소식이 알려지자 서울로 가서 오세창 등과 만나 만세운동 진행에 관한 지시를 받아 내려왔다. 3 월 10일 10시경 첫 시간 수업이 끝난 뒤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은 이광수의 지도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놀란 일본인 교장이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학생과 학부 형에게 시위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여 학생들에 의한 만세 시위는 금세 잠잠해지고 말았 다. 비록 어린 학생들에 의한 소규모 만세운동이었지만, 오수공립보통학교 만세 사건은 임실 지역에서 더욱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연달아 발생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후 3월 12일에는 임실장터, 23일에는 오수장터에서 수많은 군 중들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전주 신흥학교

1919년 3월 13일 신흥학교 학생 및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천주교 건너편에서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배부하고, 12시 20분경 남문 밖 시장 부근으로부터 제2보통학교(현 완산학교) 교정 부근까지 만세 시위를 했다. 이를 주도한 신흥학교 학생들은 고형진·남궁현·김병학·김점쇠·이기곤·김경신 등으로 모두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신흥학교 학생들은 기숙 사 안에서 태극기와 전단 등을 직접 작성하여 1월 25일 아침에 학생 70여 명과 함께 태 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때 학생 36명이 검거되어 15~29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7년 10월 5일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고 폐 교령이 내려지기 전에 자진 폐교하였다.


기전여학교

기전여학교는 신흥학교와 함께 전주 지역 3·1운동을 주도하고,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시위를 전개하는 등 활발히 항일운동을 펼쳤던 학교다. 1919년 3월 13일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에 임영신·최경애·최금수·함연춘·정복수·송순이·김신희·최요한나·강정순· 김순실·김나현·김공순 등의 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구속·기속되었다. 1930년 1 월 24일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기전여학교 학생들도 이에 호응하여 격 문을 뿌리고 깃발을 꽂으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 39명이 구속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9일에는 기숙사 학생 76명이 단식투쟁에 돌입하였다. 1937년 10월 5일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하였다.


전주고등보통학교

전주고등보통학교는 광복이 될 때까지 반전운동과 항일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했다. 1924년 4월 학생들은 일관성 없는 학제와 불평등한 반 편성에 항의하여 동맹 휴학을 단 행했다. 전교생이 참여한 맹휴에서 백상용을 비롯한 5명의 학생이 자퇴했다. 1926년에 는 교장 오사다의 민족 차별과 망언에 분개한 학생들이 퇴학당한 이종기·이용기 등의 민 족정신에 고취되어 맹휴를 단행했다. 당시 50여 명의 동의를 얻어 5개 조건을 학교 당국 에 요구했고, 이에 학교 당국이 학생들에게 탄압을 가하자 학생들은 오사다 교장을 학교 밖으로 추방했다. 교장 추방 사건으로 경찰관들이 주동자들을 연행하자 학생들은 전주경 찰서로 몰려가 ‘학원 문제에 대한 경찰의 간섭’, ‘구속 학생에 대한 혹독한 심문’ 등에 대해 집단 항의했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 장태성을 비롯한 10여 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학 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929년 5월 22일에는 권용훈·김규선 등 10여 명이 친일 학생을 구타하고 일인교사 축출을 요구하며 총궐기했다. 이때 일경에 의해 140여 명이 검거됐 다. 당시 정해철·최재선 등 14명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일부는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40년 이후 북중학교로 편제됐다.


6·10만세운동

6·10만세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이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는데 시위를 주도 한 이동환은 정읍 출신이었다. 이날 인쇄된 격문에는 “2천만 동포여, 원수를 몰아내자. 피 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내용이 실렸다.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산·순창에서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창은 고창고등보통학교 2학년 강석영이 주도해 조직적으로 이뤄졌고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동조 시위는 전주

14에서 시작됐다. 1930년 1월 20일 오전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전주공업보통학교·신흥학 교 등에서 시위하려다 실패했고, 그 후 전주·익산·고창 등지에서 학생들이 끊임없이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월 22일에는 고창고등보통학교가 고창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했으나 실패했고, 신흥학교 학생들은 1월 25일 시내에 항일 격문을 뿌리며 깃발을 들고 만세 시위를 했다. 같은 날 기전여학교 학생들도 학교 뒷산에서 격문을 살포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밖에 정읍농업학교, 삼례영신학교, 삼례보통학교, 이리농 림학교, 정읍보통학교 등에서도 시위를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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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일본 경찰이 만세 시위 군중을 진압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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